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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련재] 8.​​아버지와 우리 전주 리씨 (리광인)

潮歌家族 潮歌网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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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광인 실화련재 아,나의 중학시절이여


제2부 우리 전주 리씨

아버지와 우리 전주 리씨



1

아버지 항렬로 말하면 끌끌한 아들만이 다섯이였다. 맏이 리흥삼이 1911년 생일이고 둘째인 아버지 리돈재는 6살 터불의 1917년 7월 26일(음력)생이다. 남들은 자식들이 2살, 3살 터불일 때 이들은 5살, 6살 터불로 남다른 인상을 준다. 셋째 리상재는 1923년 생으로서 둘째와 6살 사이고 넷째 리흥도는 1928년 생으로서 셋째와 5살 차이, 막내 리흥길은 1933년 생으로서 넷째와  5살 차이를 이룬다. 막내를 제외한 네형제는 모두 함남도 리원군 배덕리에서 태여났으니 배덕리라고 배덕집, 배덕 리씨로도 통한다. 


나의 아버지 리돈재와 친구들 옛사진


그중 둘째 리돈재와 셋째 리상재가 가난한 리씨네 농가에서 생의 계주봉을 받아 쥐고 근근득식으로 소학교 공부를 하지만 조선이란 이 반도나라는 사람들은 많고 땅이 척박한데가 일본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의 등살로 살아가기가 말이 아니다. 그 시절 두만강 이북땅은 땅이 비옥하고 살기가 좋다는 말이 무성한데서 부모님들과 결혼장가를 든 큰 형님 리흥삼과 둘째 리돈재는 두만강 이북 북간도로의 이주를 결단했다. 


모진 세월에도 봄, 봄은 오고있었다. 가난한 살림에도 약간한 밭뙈기와 가내집물들을 처분하니 리원군에서 두만강 건너 북간도 개산툰, 룡정까지의 북행렬차에 오를수 있었다. 그때가 1933년 봄으로 알려진다.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 형제들에서 결혼한 사람은 큰아버지 리흥삼과 둘째인 아버지 리돈재 뿐이였다. 안해되는 녀인은 나의 어머니로 되는 가난한 집 딸 김수남(金秀男)이였다. 아버지 두 가족에 친동생들인 셋째 삼촌이랑 넷째 삼촌이랑 큰고모랑 모두 동행하게 되였다. 

나의 어머니와 친구 옛사진


내가 왜 어머니를 가난한 집 딸이라고 할가, 아득한 그 세월 사회 최하층사람들 모두가 그러하다지만 어머니 가족은 정말이지 털면 먼지 뿐인 가난의 련속이다. 어머니 어릴 때 어머니의 친아버지는 남의 집 집짓기에 나섰다가 불행하게도 바닥으로 떨어져 운명을 달리했으니, 나도 네살에 아버지를 여의여 가난속에서 몸부림친 시절을 거치여 보아 알지만 기둥이 무너진 한가족의 운명은 등전풍화와도 같다. 언제 풍지박산날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머니가 결혼에 이르고 남편 리씨네 식솔을 따라 북간도 이주길에 오른다. 다시 외워 보지만 이해는 1933년.


이해 봄의 어느날 북간도 룡정역이라고 내리니 경비가 걱정이다. 이주길에 오른 돈재네 리씨일가는 룡정에서 목적지인 충신장(오늘의 화룡시 소재지) 아래 토산자까지 80리길을 걸어가기로 작심했다. 그때 룡정에 설치된 간도일본총령사관에는 아버지 리돈재의 절친한 친구가 령사관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친구가족의 북간도행을 알게 된 령사관 친구는 일부러 돈재친구를 만나주며 내가 소개해 줄테니 령사관에 취직하라고 권고하였다. 고향 배덕리에서 소학교공부를 한 돈재는 소학교정도라지만 사람됨이 정직하고 지방에서는 인테리출신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데서 령사관 취직으로 추천할만도 했다.  


아버지는 친구의 호의는 고맙다면서 말을 이었다. 

“일본놈들의 등살에 살기 어려워 북간도행에 올랐는데 내가 령사관에 들어가 그놈들의 일을 해줘? 안돼, 안돼.”


2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인 아버지의 태도는 그야말로 단호하다. 그때 아버지는 랑랑 18세였다. 셋째 상재로 말하면 평소 제일 믿고 따르는 둘째 형님, 그러는 6살우인 둘째 형님이 돋보이기만 하다. 그들은 투도구와 이도구가 들앉은 평강벌을 종단하면서 근 100리 길을 걸어냈고 마침내 목적지 토산자에 이르러 보짐을 풀어놓았다. 


토산자는 서남쪽 관문을 넘어서면 그후의 화룡현성으로 된 삼도구와 이어지고 동북쪽 목도고개를 넘으면 60리 평강벌과 이어진다. 그같은 삼도구와 평강벌 사이 아담한 분지에 자리한 토산자는 사방이 뭇산들로 둘러싸여 이밥을 먹으며 도목나무를 땔나무로 하는 리상적인 고장이였다. 그러나 일제치하의 하늘아래 어디간들 편한 생활을 하리오.


아버지네 일행이 룡정에 이르러 화룡쪽 토산자(土山子)를 택한 것은 연줄이 있은것으로 짐작된다. 토산자란 마을 뒤 북쪽에 구릉같은 둘레 10여킬로메터 잘되는 언덕이 있어 생겨난 이름인데 커다란 언덕 전체가 토흙으로 이루어졌다. 나의 륙촌 기선(基善)형님네 할아버지랑 먼저 중국에 이주했고 토산자에서 살고있었으니 그리 된것 같다. 


1970년 여름, 큰 형님 리광렬 결혼식 합영사진


그 세월에 함남의 리원군에서 고향을 뜬 우리 리씨들이 아주 많다. 화룡 경내의 서성진 리원촌(李原村) 리씨들은 우리 먼저 들어왔다. 우리 리씨네가 들어와서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리원촌(후에 장항으로 번지어짐)으로 불리웠다. 비슷한 시기에 여기 토산 3대의 안채집 리씨들도 토산자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그시절 토산자에는 아버지 리돈재의 리씨가족보다 먼저 이주와서 삶의 토대를 마련한 이들 리씨네 “리면장”이라는 사람이 살고있었다. 바로 토산중학교 빈하중농선전대 신씨가 “광인이 8촌이 부농”이라던 그 사람이다. 그런 8촌이 조선시절 고향에서 면장질을 했다고 리면장이라고  불리우지만, 나는 볼수도 없었다지만 리면장 이 사람은 경제리속이 트고 욕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고한다.


리면장이라는 이 어른은 자기한테 땅마지기나 있다고 아버지네를 보고 농사질해 살라고 한다. 그 “인자”함에 머리 수그리고 절을 하고픈 마음. 그러던 리면장 어른이 가을이 되자 조이를  한하지 건너 한하지씩 걷어가 버린다. 자기네 밭이니 반작농사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란다. 격분한 아버지 리돈재는 이놈의 세상살이 어떻게 하느냐며 길길이 뛴다. 


“형님, 이러고만 있을 때가 아니잖우. 가기우.”

“그래 가자!”

셋째 리상재도 펄펄 뛰다가 둘째 형님을 잡아 끌고 면장어른을 찾았다. 금방 열살 정도밖에 안된 소년 상재가 형님과 함께 펄펄 뛰니 리씨친척이라는 리면장은 큰소리를 버럭 지르다가 주눅이 들고만다. 결국은 반작으로 가져온 조이하지를 돌려줄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리치밝은 두 형제는 면장어른의 밭이라며 일부를 갈라 놓았다.  


3

빈하중농선전대 신씨는 어려서부터 나의 아버지와 한 마을에서 자라면서 친구인데서 금방 우에서 스치고 지난 우리 8촌인 리면장어른과 아버지 관계를 잘 알고있었다. 그럼에도 왜서 자기 친구의 어린 아들을 한사코 누르려고 했는지 정말 리해가 가질 않는다.


보지도 못한 면장할아버지, 어느 세월인가 이 면장어른이 사망된후 동산의 산기슭에 묘소를 잡았다. 토산자의 리씨네 마을 산소들은 모두 이 어른이 조선의 옛 식대로 동산 산언덕에 자리를 배치하였었다. 우리 리씨네 묘소 앞에 흰돌을 쪼아만든 아기동자(童子)가 좌우로 서로 마주하고 서 있었는데 묘소배치를 전부 어르신들 생전에 손을 댄 것이였다. 



1978년 7월 2일, 셋째 형 리광오 결혼식 때 삼촌과 여러 사촌 형제들 화룡현 광평농장을 흘러 내리는 두만강가에서


돌비석은 리흥삼(李兴三), 즉 나의 큰아버지가 중국인령감을 데려다가 우리 할아버지 묘소에 글을 새겨 세워 놓았다고한다. 일찍 우리 리씨 묘소에 이르러 아기동자를 본 기억이 새록새록하다지만 너무도 어린 철부지 시절 이야기다. 리면장어른, 보지도 못한 리면장어른인데 신씨는 기어이 우리와 이어놓으며 누르려고만 하니 후유..


1933년 봄 아버지 리돈재 일행이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 토산자로 이주하니 토산자 앞 벌판은 무연한 버들밭이였다. 그 버들밭을 번지여 밭을 만드니 지금도 그곳은 모래불땅으로 되여있다. 


셋째 형 리광오 결혼식 때 큰아버지 리흥삼 어른과 삼촌 리흥길 어른 모시고


1945년 광복후 큰아버지 리흥삼은 살림을 보태겠다고 석탄실이를 했다. 북쪽 오명탄광(五明煤矿)의 것을 실어서 해란강을 건너 관지(官地)의 기차역으로 운반하였다. 오명탄광을 일제 때 삼화회사(三和公司)라고 했다. 그 시절로 말하면 꽤나 이름난 탄광이였다.


아버지 리돈재의 생각은 달랐다. 농사군에게는 자기에게 속한 땅이 있어야 한다면서 1947년 토지개혁 때  동북쪽 동산촌(东山村)으로 가는 큰길 량쪽의 모래언덕을 골라 잡았다. 일제시절에 일본놈들은 토산자 북쪽지대인 삼화탄광(오명탄광의 전신)의 석탄을 토산자 앞벌인 해란강너머 관지역까지 수송하려고 신작로를 닦으면서 낮다란 언덕을 파서 올리니 제법 큰 .인공모래언덕이 형성되였다.  


아버지는 힘을 내면 내는것만큼 살수 있다며, 해방된 강산에서 잘 살아보겠다며 사불땅이라고 남들이 들여다 보지 않는 언덕땅을 언녕 눈박아 두었다. 어느날 아버지는 토산자 동쪽의 목도고개(토산에서 서성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 목도고개 바로 아래마을이고 평강벌 최서단인 서성 명암(西城明岩)에 가서 후일 미츄린아바이로, 연변 사과배 시조의 한분으로 받들리는 최일선(崔日善)을 찾았다. 최일선씨 한테서 사과배 묘목이랑, 복숭아, 살구 묘목이랑 구해다가 토산자의 모래언덕에 한포기, 두포기 정성스레 심었다. (계속)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1부 어엿한 중학생 중학교 시절 첫 시련/뢰봉ㅡ빛나는 본보기/또 하나의 영웅인물 구양해/그는 리과 나는 문과/작문 그리고 시쓰기/만인갱 참관과 창규친구 


2부 우리 전주 리씨 중학교졸업반시절/아버지와 우리 전주 리씨/명암촌과의인연/내고향모래언덕/셋째삼촌  리상재렬사/가난과 동무하다 1/가난과 동무하다 2 

3부 시골소년의 세계 군사훈련의 나날/중학교 모택동사상선전대/두만강가남석마을/숭선쪽두만강은절경이라오/10여일후기쁜소식 

4부 졸업반 시절 봉산림 탐험 이야기 1/봉산림 탐험 이야기 2/까치 둥지랑 종다리 둥지랑/네가지 지향 양보하고/나의 소꿉 친구들/그날의 그 사인들 1/그날의 그 사인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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